2025. 9. 19. 17:48ㆍ리뷰/영화
들어가며
대런 애러놉스키 감독의 <레퀴엠>, <블랙스완>을 즐겁게 봤다면, 애니메이션 <파프리카>와 <인셉션>을 보고 관계성을 느꼈다면, 혹은 세기말 찬란한 거품이 침몰하기 이전의 일본에 울리던 시티팝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를 이미 알 것이다. 적어도 제목은 들어봤을 것이다. 1997년 개봉한 이 영화는 초저예산 작품임과 동시에 연출과 영화 미술에 있어 세계 여러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친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이다. 인셉션의 연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파프리카>, <블랙스완>과 <레퀴엠>의 연출에 영향을 준 <퍼펙트 블루> 모두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이다.
오늘은 25년 9월 4K 화질로 국내 재개봉한 <퍼펙트 블루>의 관람기를 작성한다.
목차
- 퍼펙트 블루
- 감독이 보여주는 일상과 환상의 혼재
- 총평

퍼펙트 블루
곤 사토시
이 영화는 곤 사토시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데뷔작에 이 정도 수준이 가능하냐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 감독은 영상 미술 게통에서는 이미 전문가였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할 점은 '극의 초반에 제시되는 미스터리를 극이 끝난 이후까지 가져갈 수 있는 추력이 어디서 나왔는지'와 '이토록 참신한 연출이 어떤 래퍼런스를 가지는지' 정도가 될 것이다. 퍼펙트 블루의 원작 소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으며, 이 작품 제작 당시에는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원작의 모티프 역시 좋았다고 할 수 없다.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가며 핵심을 유지한 추력은 그저 그가 감독 데뷔 이전에 이미 많은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던 경험이 적재됐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연출의 래퍼런스 역시 당시의 원화/레이아웃 작업을 통해 발현했다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일상적 장면/소재와 환상의 조합을 화면에 풀어낸 말도 안 되는 연출이 오직 '본인의 역량'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 감독은 천재로 불린다. 하지만 감독의 대표작 파프리카와 퍼펙트 블루는 모두 원작이 있는, 원작을 초월하는 작품인데 반해 오리지널 작품들은 위 두 작품만큼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오리지널 작품 망상대리인과 천년여우 역시 연출 수준이 매우 높아 시간이 있다면 보는 게 좋다.
줄거리
비인기 아이돌 그룹 챰(CHAM)의 메인보컬 미마가 소속사의 사정으로 아이돌 은퇴 후 배우로 전향한다. 누군가 '미마의 방'이라는 홈페이지에 미마를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여러 사실을 게시한다. 미마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도, 거울에서도 자신이 아이돌이었던 시절의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미마가 아이돌로 살아야 한다고, 더럽혀졌다고 말한다. 대사 한 줄짜리 단역을 받은 미마는 의문의 누군가에게 '아이돌로 살라'는 협박을 받기 시작한다. 촬영 당일 미마 앞으로 온 편지를 소속사 대표가 대신 열고, 폭발한다. 미마는 스트립바에서 집단 강간을 당하는 신을 권유받고, '용기 내어' 그 신을 수락한다. 미마의 매니저이자 전직 아이돌 루미는 이에 격분하고 슬퍼한다. 이후 미마의 정신은 추락한다. 스트립바 신을 쓴 작가가 아이스피크로 살해당한다. 미마는 성인 잡지 사진을 찍는다. 사진사 역시 아이스피크로 살해당한다. 미마는 피자 배달원으로 변장해 사진사를 죽였다. 이는 환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다. 미마를 쫓아다니던 팬에게 스트립바 신을 찍은 세트에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탈출한다. 그 팬과 소속사 사장이 아이스피크로 살해당한다. 루미는 미마에게 '미마의 방'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 방에는 미마가 아이돌을 은퇴하며 떼어냈던 챰의 포스터가 있다. 죽은 물고기들 역시 모두 살아있다. 문을 열고 아이돌 시절의 미마가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이돌 복장을 입은 루미였다. 아이스피크로 모두를 죽인 것은 루미였다. 그녀에게는 '아이돌 미마'를 더럽힌 '여배우 미마' 역시 가짜일 뿐이다. 루미는 미마가 되고자 한다. 루미는 미마를 죽이기 위해 미마를 쫓다 버스에 치일 위기에 처하지만, 미마는 루미를 구한다.
루미는 정신병동에 들어간다. 루미가 보는 거울 속엔 여전히 아이돌 미마가 있다. 미마는 루미를 면회하고 나와 차에 탄다. '내가 진짜야.'
감독이 보여주는 일상과 환상의 혼재
감독이 환상을 사용하는 방법
감독은 영화 속 인물과 상황을 상당히 교묘하게 움직인다. 2006년 작 <파프리카>가 '환상으로 전환되는 일상'을 점유했다면, 이 작품은 정신착란적 환상과 일상의 교대 순환에 집중한다. 미마가 환상을 보는 시점부터 청자 역시 환상과 일상을 구분할 수 없다. 루미가 범인으로 밝혀진 뒤에도 루미가 꾸며놓은 '미마의 방'에 살아있는 물고기들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성장을 이뤄낸 미마의 '내가 진짜야.'라는 대사조차 혼동하게 된다. 극중극 더블 바인드가 사실은 살인자 미마의 취재과정이었다는 장면이 실제 하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미마는 이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피해자, 목격자, 가해자로 중첩한다. 그 착란된 중첩 속에서 미마가 본질을 찾는 과정은 극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으며 마중 나오는 것은 혼재된 환상들 뿐이다. 이 장치들을 통해 작품은 상황과 사건에 대한 이해가 아닌 에피소드에 대한 흘려보냄을 강제하고 시사한다.
이 작품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단순하다. 단순하다 못해 흔할 지경이며, 심지어 이 뻔하고 무성의한 스토리 라인은 '졸작'스럽다. 보통의 작품에서 환상과 착란이 표현되고 소화되는 과정이 대부분 허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환상과 착란 만으로는 인물의 동기와 금기가 핍진성을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이 작품이 수작인 이유 역시 이와 같다. 그 어려운 일을 시각 연출로 뚫어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미마가 겪는 착란은 진한 RGB가 번갈아가며 반짝거리거나, 불안을 강제하는 사운드로 처리되지 않는다. '미마가 일상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데 사용했던 소재', '자신이 후회하는 선택에 대한 '예전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자기 시선과 일치하는 시점', '자기 파괴적 순간'으로 사건이 집중된다. 이를 통해 청자는 미마가 겪는 착란에 몰입한다. 이렇게 착란이 핍진성을 가지면 그때서야 미마도, 청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환상이 밀려온다.
우리가 착란을 사용하는 방법
착란은 사실 흔하다. 질병의 수준에 가 닿는 일 역시 빈번하지만, 보통의 사람들 역시 착란을 겪으며 산다. 대개 분명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다시 안방 탁자 위에 있는 식이다. 그런 일이 없다면 축하한다. 이런 착란의 원인은 뇌에 있다. 우리 뇌는 믿던 대로 믿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이는 범위를 좁히다 보면 '편견'이라는 개념에 외접한다. 편견, 선입견은 말의 뉘앙스와 달리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뇌기능이다. 눈앞에 서있는 맹수를 보며 '저 호랑이는 개체성을 가진다. 살펴보자. 대부분의 맹수가 사람을 포식했음은 당장 나의 사망 확률이 높음을 시사한다. 저 호랑이는 맹수다. 나의 생존 확률은 지금도 낮아지고 있다. 도망쳐야 한다.' 따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친 돔황챠'가 디폴트다. 요는 효율화다. 인간은 지성을 가져 '전지(全知)'에 닿을 가능성을 가지지만 결코 전능할 수 없다. 때문에 생존을 고민해야만 하며, 대부분 상황에서 빠른 판단이 정확한 판단에 우선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고를 전력투구해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방향으로 뇌가 선택한 결과가 선입견이고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그 덕을 많이 본다. 비록 선입견이 옳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런 생존환경과 그에 발맞춘 우리의 구조 덕에 착란은 결코 우리와 분리되지 못한다. 착란은 생존을 우선하는 뇌가 포기한 합리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사람은 지성구조부터가 합리보다 생존이 먼저다. 미마는 그런 면에서 안쓰럽다. 자기를 잡지 못해 방어기제가 없고, 방어기제가 없어 '피해자'인 자신을 '가해자', '방관자'에 이입한다. 그런 미마는 루미를 구해낸 뒤 합리-이해에 부합하지 않는 루미를 가만히 바라보고 떠나며 '내가 진짜'라고 말한다. 미마는 착란을 극복하지 않고 흘려보냄으로 성장했고, 생존에 달했다.
총평
퍼펙트 블루 4K 재개봉 관람 전일자에 '모노노케 히메' 4K 재개봉판을 관람했다. 예산의 차이가 워낙 큰 두 편을 연달아 보니 낙차가 심각했다. 러닝타임이 1.5배 길다고는 하지만 퍼펙트 블루의 동화는 3만 장, 모노노케 히메의 동화는 14만 장에 달한다.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연출이 살렸다는 점이다. 그 예산으로 이렇게 좋은 작품을. 물론 4K로 보는 의미는 없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정도로, 성적 묘사와 고어한 장면을 굳이 타인과 공유하면서까지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하진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을 본 적 없다면 반드시 혼자,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서 한 번은 관람하길 바란다. 메시지가 엄청난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연출 측면에서 만큼은 '정상급' 감독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평점 3.5
각주 : 작품 내 해석이 필요한 메타포와 상징은 전부 '환상'에 치중되어 있는데, 그 메타포와 상징이 모두 극 내부로만 순환된다.(물고기 두 마리, 극 중 드라마, 사이코드라마 등) 주제의식은 엔딩에 몰려있지만 정작 이 부분에 대한 표현은 빈약하다 보니 굳이 이야기 안에서만 순환하는 메타포를 풀 이유가 없어 해석은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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